따뜻한 세상을 꿈꾸며

오름수학 최은희 원장

“아너 소사이어티 기사를 본 순간,
다시 시작해야겠단 의지가 솟더라고요”

대학에 가기 위해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와 그야말로 온갖 고생을
다 했다. 밥보다 물로 배를 채우는 날이 더 많았다.
대학 시험을 앞두고 학원 선생님이 단과 수업 두 타임 수강증을
끊어준 게 여태 갚아야 할 고마운 빚으로 남아 있다.
경기 아너 소사이어티 51번째 회원 최은희 원장의 이야기다.

최은희 원장

학원 접을 위기에 본 아너 소사이어티 기사

분당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오름수학 최은희 원장(이하 최 원장)은 경기 아너 소사이어티 51번째 회원이다. 5년 약정으로 기부를 시작해 지난해 7월 완납했다. 약정 기부를 시작하고 완납을 한 지금 최 원장에겐 34개 통장이 훈장처럼 남아 있다. 모두 약정 기부금을 모아온 소중한 통장이다.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 당시 학원 경영이 심각했어요. 학원을 접어야 하나 고려했을 정도로요. 그때 우연히 사랑의열매 아너 소사이어티 기사를 봤는데… 그 순간 ‘이거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그래서 확, 질러버렸습니다.(웃음)”

작은 체구지만 시원시원한 말과 행동이 매력 있는 최 원장이다. 학원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가입을 결정했다니…. 요란하지 않게 말했지만 최 원장의 눈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누굴 도왔다는 생각은 거의 없어요. 갚는다고 표현하는 게 제겐 더 맞는 말이에요. 그런 느낌이 강해요. 왜냐하면 저도 큰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언제나 제 마음 한편에는 갚아야 하는데, 이걸 꼭 갚아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늘 있었어요.

” 최 원장은 누구에게 커피 한 잔 허투루 얻어 마실 인상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도대체 무슨 빚을 졌다는 걸까?

아너 소사이어티 완납을 완수하고 나니 의외로 담담하더라고요. 스스로가 기특하긴 했어요.
하지만 누구를 내가 도와주었다는 생각은 안 해요. 드디어 도움받은 걸 갚았구나 했죠.
아너 소사이어티가 아니었으면 아마 평생 갚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받은 도움의 고마움을요.

최은희 원장

인생을 바꿔준 두 선생님

최 원장은 두 선생님을 이야기했다. 한 분은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이고, 또 한 분은 재수 시절 학원 선생님이었다. 최 원장은 자신이 선생님이 된 것도, 또 기부를 하게 된 것도 모두 이 두 분의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홀로 되신 어머니와 가족 모두 시골로 이사를 하게 됐죠. 전라북도 부안으로. 당시 제 별명이 ‘빵순이’였어요. 얼마나 공부를 안했던지 늘 빵점을 맞았거든요.”

시골로 전학을 가 만난 6학년 담임선생님은 어린 최 원장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며, 열심히 격려하고 가르쳐주었다. 최 원장은 그 선생님을 만난 후 늦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늘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늘 사투였고 사치였다.

“중학교 때도 늘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불려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고등학교에 간다니 온 동네 사람들이 혼을 내는 거예요. 딸이 돈을 벌어서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지, 무슨 고등학교냐고요. 너무 슬퍼서 매일 교회에 가서 기도하며 울었더니 목사님이 ‘쟤는 학교 보내야 한다’고 엄마를 설득해주셨어요.”

물로 배 채우며 공부하던 시절

최 원장 인생을 바꿔놓은 두 번째 선생님은 재수 시절 만난 학원 선생님이다. 고등학교도 겨우 진학했는데, 대학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최 원장은 포기하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대학 진학을 준비했다. 최 원장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기억하는 시간이다.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어요. 학원 급사부터 공장 보조 일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해서 버는 돈이 한 달에 15만 원 정도 됐어요. 대학 등록금 저금하고, 독서실비 내고, 지하철비 좀 남겨두면 한 달 식비가 채 2만 원도 남지 않았어요. 친구 도시락을 같이 나눠 먹기도 했는데, 돈도 없고 친구도 오지 않는 날은 어쩔 수 없이 수돗물을 먹곤 했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 수돗물을 마실 때면 물을 먹는 건지 눈물을 먹는 건지 알 수 없었다며 최 원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대학 시험을 앞두고 어렵게 공부하던 최 원장에게 학원 선생님 한 분이 단과 수업 두 타임 수강증을 끊어주셨다. 최 원장은 자신과 도시락을 기꺼이 나눠 먹던 친구, 그리고 자신에게 수강증을 끊어준 선생님 덕분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나중에 제가 그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너무 고마워서요. 그런데 정작 선생님은 저를 기억 못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때 더 크게 깨달았어요. ‘아! 나의 작은 행동 하나가 어떤 사람에겐 인생을 바꾸는 큰 의미가 될 수 있구나’ 하고요. 선생님에겐 별일 아닌 작은 도움이나 베풂이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제겐 인생을 뒤바꾸는 일이었거든요.”

더운 여름, 선풍기 한 대로 버텨준 가족

대학에 가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그 후엔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열심히 살았다. 남편 직장 때문에 광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는데, 큰아이 두 살 때 분당으로 왔다.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에 있다가도 압박붕대를 감고 학원 수업을 했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교육열 치열하기로 유명한 분당에서 이름난 수학 선생님으로 자리도 잡았다. 명문대도 턱턱 보내던 학원의 위기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받은 것이 화근이 됐다. 하지만 최 원장은 당시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일수록 자신이 더 필요하다는 사명 때문이다.

“제가 받았잖아요, 그 도움을. 그리고 변했잖아요, 인생이. 그런데 어떻게 그 아이들을 가려서 받아요. 오히려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가요. 그때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에 가입을 한 거였어요. 그때 알았어요. 내가 받은 것을 갚을 때라는 것을요.”

학원을 접지 않고, 공부가 부족한 학생들을 받아 더 열심히 가르쳤다. 그리고 열심히 절약하고 모아 약정 금액을 매달 사랑의열매에 보냈다. 5년 완납을 했을 땐 의외로 담담했다고 최 원장은 말한다.

“남편과 아들 두 녀석에게 특히 고마워요. 기부 약정 때문에 더운 여름에도 선풍기 하나로 버텼거든요.(웃음) 그래도 싫은 내색 한 번 안 했어요. 지금도 집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남편 모습이 떠올라요.”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사명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다시 학원은 좋은 평판이 나고 학생들이 모이고 있다.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최 원장은 진짜 선생님이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벌써 바꿔놓았을 그런 선생님 말이다.

돈이 없어서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 너무 두려웠어요. 가진 것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고….
내가 꿈꾸는 것이 정말 꿈으로만 끝나면 어쩌나 무서웠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그런 아이들이 있을 것 같아요. 아니, 꼭 있을 거예요.
저는 그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어요.

강은진 사진 이승재